이제는 오리(고기)와 친해지고 싶다 - '화미가' 녹두점

어느 날, 김고문이랑 신림동 골목을 지나가다가 우연하게도(고맙게도) 정문에서 오리고기 시식행사를 하는 식당을
지나가게 됐다. 절대로 그냥 지나칠 리 없는 우리 둘은 오리고기 두 점씩을 먹어봤는데, 참나무 숯에 적당히 훈제 된 고기들은
지금까지 갖고 있었던 오리고기에 대한 편견을 한 방에 날려버릴 만했다.

그 이후로 계속 그 식당에서 오리들과 친해질 기회만을 노리다가, 드디어 지난 주에 친구들 넷이 그 곳에 모여 간단히
점심을 먹기로 했다.


 
우리가 처음 시식을 했던 테이블인데 요즘은 시식행사를 안 하는 거 같았다.




자리에 앉자마자 40,000원짜리 훈제 오리 바베큐大를 시키니 하나둘씩 반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. 어느 식당에서든 가장
흥미진진한
순간이다. 부추절임은 웬만한 고기집에 가면 기본으로 나오는 반찬이고, 그 옆의 살얼음과 도토리묵이 동동 떠 있는 김치국물이 참 시원새콤해서 좋았다. 소면이라도 후루룩 말아 먹고 싶은 맛이랄까.




이것도 고기집 반찬의 트렌드, 도라지 무침! (숨은 그림 찾기 : 순진한 애욕쟁이 김 모군)




반찬들을 몇 번 깨작거리고 있으니까 드디어 주인공이 등장했다. 야들야들 광채가 나는 비주얼은 마치, 촬영스탭들 한 가운데
서있는
장동건을 생각나게 했다. 한가했던 손이 갑자기 바빠지고, 나의 호흡도 점점 거칠어졌다.




오리고기가 장동건이라면, 마늘은 오달수? 훈제가 잘 돼 있으니까, 오리고기 특유의 냄새가 싫어서 못 먹었던 사람이라도
부담없이 즐길 수
있을 거 같았다.




새콤한 맛이 좀 강한 게 아쉬웠지만 명이나물, 백김치, 깻잎절임도 단순한 엑스트라는 아니었다.




「오리가 나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나는 다만 하나의 깻잎이었다. 오리가 나의 몸 위에 살포시 앉았을 때 나는 그에게 가서
오리고기쌈이 되었다.」

얼마 전에 요리계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피에르 가니에르가 우리나라에 와서 "한식의 세계화를 위해선 비주얼에 대한 연구가
더 필요하다."라고 했는데, 나는 프랑스 요리의 소꿉장난 같은 비주얼 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좀 더 원초적이고 가식 없는
비주얼이 더 맛깔 나게 보인다.
 
평소에 먹는 양이 결코 적지 않은 남자 넷이 오리고기大 하나만 시켰을 때는 양이 좀 적지 않을까... 했었는데, 먹다 보니
의외로 양이 찼다. 엄청 배부르다기 보다는 아주 적당히 든든한 느낌이었다.




고기를 시키면 나중에 밥과 국수 중에서 하나를 고를 수 있는데, 나는 따뜻한 국물을 먹고 싶어서 국수를 골랐다.
국물까지 다 마시고 나니까 적당히 든든했던 느낌에서 많이 배부른 느낌으로 바뀌었다. 나중에 계산을 하려고 하니
김고문이, 자기가 시원하게 쏜다고 했다. 뱃속도 훈훈하고, 분위기도 훈훈하고...

우리나라에서는 회식하면 거의 반사신경처럼 돼지나 소...(가끔 개) 같은, 수 십년동안 봐왔던 애들하고만 또 보려는 습성이
있는데, 이제는 오리와 양의 새로운 매력에도 한 번 빠져보자. 처음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그 맛과 향이 나중에는 오히려
중독이 되는 법이니까.